한국 근현대사

한국현대사 - 해방 정국의 맥락 설명틀

취미와 문화 2023. 6. 30.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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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복 직후(1945.8.15~9월 상반기) 건국준비위원회 갈등

- 개요 : 한국 사람들의 '두루두루 잘 살면 된다'는 대동사상이 '사회주의'와 혼동되면서, 사회주의 이념이 한반도에 비교적 우세한 상황이었다. 한편 미국 측은 이런 상황을 경계하여 강력한 미군정의 통제 정책을 실시할 필요성이 있었다.
- 우파 : 이승만을 주석으로 올리는 등 우익 인사들을 주요 간부로 설정해놓았으나, 실상은 국내에 있던 좌파들이 강성하여 더 지지를 받던 시절이기에 우파들이 열세 속에서 이탈을 하게 되었다. 중도 우파 안재홍의 탈퇴를 전후로 우파의 이탈은 가속화된다. 이렇게 이탈한 우파는 친일 지주세력과 합쳐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게 된다.
- 좌파 : 건국준비위원회를 주도하게 된 좌파는 앞으로 들어올 미군정에 대비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정부를 자칭하여 협상의 주도권을 가지려고 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국내외의 한국인이 스스로 만든 정치단체의 실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로써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포함한 모든 정치 단위들이 개인 자격으로 국내 정치판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
 
 

2.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미, 영, 소. 1945.12월)

- 개요 :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골자는 한국의 정부수립 자문을 위한 '공동위원회'의 설치, 정부 설치 후 5년 간의 신탁통치를 시행할 것에 대한 논의였다. 회의의 결과가 발표되기 하루 전, 동아일보에서는 '소련이 신탁통치를 제안하였다'는 치명적인 오보를 터뜨려 '사회주의는 곧 매국'이라는 이념이 퍼져나가게 된다. 그 프레임에 편승한 한국민주당 의원들은 '일제 하 지주세력'이라는 이미지를 던져버리고, '애국적 반탁주의자'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한편 여운형, 조소앙 등 지식인들은 회의의 정확한 전후 사정을 파악하여, 당초 미국이 신탁통치를 제안한 것이며, 신탁통치 자체가 '식민지배'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아일보 오보사태 직후부터, 이미 '찬탁과 반탁'의 구도는 민중들에게까지 뿌리깊게 박혀버렸다. 
- 찬탁(좌파 다수) : '매국적 사회주의'라는 이미지가 퍼져나가면서, 유리하던 사회주의 이념은 점점 그 기세를 잃게 되었다. 한편 조선공산당 등 국내 좌익 세력들은 신탁통치를 '식민지화'가 아닌 '연합국의 후원'이라는 지식인들의 해석을 진영 내에 퍼뜨렸고, 좌파는 대개 찬탁 진영으로 노선을 선회하였다. 그렇기에 미국과 소련의 정부수립 과정에 적극 참여하기 위한 '민주주의 민족전선(1946.1.19 발기 / 같은 해 2.19 결성)'을 결성하게 된다.
 
- 반탁(우파 다수) : 좌파의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대항하여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 결성
1)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 이승만은 미국의 입장에서 소련과 사회주의 세력을 경계하여, 친일 지주 세력과 어쩔 수 없는 결탁을 감수하였다. (이승만 역시 독립운동가이기에 반일 성향이 짙었지만, 이 시점에선 그의 반공 이념이 더 강력하게 작용한 것 같다.) 이승만은 기존에 좌우합작을 표방하였으나, 점차 자신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 1945.10.23~1946.1.15)를 바탕으로 민족통일의 리더가 되길 원했다.
 
2) 김구 : 김구는 애매모호한 시점에 광복이 이루어지는 바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였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점에 김구에게 찬탁-반탁 정국이란 어쩌면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반탁을 통해 본디 꺼렸던 사회주의 세력을 배제하는 동시에, 민중 권력을 등에 업고 집권한다면 우파의 친일 세력을 일제히 소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건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지만,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집권을 꿈꾼 것은 맞다. 김구, 약산 김원봉, 조소앙 등 유명한 임시정부 세력은 '비상정치회의'를 구성하였고, 이승만 주도의 '독촉중협'과의 협조를 꾀했다.
 
3) 이승만의 '독촉중협'은 김구의 '비상정치회의'를 흡수하여, '비상국민회의'로 개칭하였다(1946.1.18). 비상국민회의의 공동 영수로 이승만과 김구가 추대되었다. 이로써 우익이 '반탁'이라는 이름 하에 결집하였다. 마침 좌파가 '민주주의 민족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친소련파 기구가 발생하였기에, 미군정은 우익 쪽에서도 대항하는 기구를 만들었다. 바로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회로 구성된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이다.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개최되었지만, 소련은 정부 수립 논의 과정에 반탁 인사들을 제외하고자 했고, 미군정은 그들을 포함하고자 했다. 그 결과 회의는 결렬되었다. 날이 갈수록 좌우 인사들은 찬탁-반탁 구분 등을 기폭제로 하여 빠르게 분열되었다.
 
이승만은 이 기회에 남한에서 김구의 임정세력을 누르는 한편, 친일 자원을 적극 이용하고자 하는 미군정의 입장을 등에 업고 한층 더 도약하고자 했다. 이승만이 바로 '남한만의 단독정부' 발언으로 유명한 '정읍발언' 연설(1946.6.3)을 한 것이다. 물론 이미 김일성이 강점기 시절부터 민족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조만식 등을 연금하고, 북한 내 독재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시절이기에 '정읍발언'이 한반도를 가르는 결정타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어쨌건 이로써 사회주의 진영과의 갈등은 완전한 단절로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3. 미군정 지원 하에 '좌우합작운동(1946.7~)' 정국

- 개요 : 극좌 세력은 반탁운동 이후 '매국적'이라는 공격을 당하며 점차 불리해지고 있었다. (한편 미군정 측에서도 '정판사 위조지폐사건(1946.5.15)' 등으로 좌파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좌파를 점점 예민하게 만들기도 했다.) 좌우합작을 해 봤자, 어차피 미국 진영에 참여하는 단체에 점차 힘이 실릴 것이었다. 한편 미군정은 역시 좌우합작운동을 적극 추진하였고, 중도 우파의 김규식과 중도 좌파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가 모두 만족할 만한 협상안을 만들고자 하였다. 극좌파 입장에서 '중도 좌파'라고 하는 여운형은 미군정의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 좌우합작 7원칙 발표 시
1) 이승만 : 이승만은 이미 '정읍발언' 전후로 우파의 단독정부론으로 마음을 정했기 때문에, 비협조적인 사회주의 진영을 이유로 지적하고는 '좌우합작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할 수 없음'을 밝혔다.
2) 김구 : 김구 역시 극우 성향을 지녔기에 사회주의 세력과의 결합 자체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는데, 이 운동이 미군정 주도의 정부 수립 준비이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익과는 동떨어졌다는 점에서 참여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해서는 환영하였다.
3) 한국민주당 진영 : 좌우합작 7원칙의 내용 중 '유상매수 무상분배'로 인해 국가 재정이 파탄날 것이라고 공격하였는데, 이들이 애초에 지주층의 입장을 대변하는 성향을 지녔기에 찬성할 리 없었다.
4) 사회주의 진영 : 이미 소련 측은 좌우합작에 참여하지 않는 입장이었고, 여운형이 미군정의 운동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좌우합작 7원칙 내용에 대해서도, '토지의 유상매수' 부분이 사회주의 이념과 맞지 않았다.
 
- 미군정 주도의 '좌우합작'을 추진하기 위한 입법의원의 구성
미군정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좌우합작 원칙을 반영하기 위해, 좌우합작파와 이승만-한민당 계열로 구성된 '남조선 과도입법의원(1946.12)'을 출범시켰다. 이 입법의원은 좌우합작파 주류의 관선의원 45명, 이승만-한민당 계열이 주류인 민선의원 45명으로 구성되었기에, 소련 측에서는 인정할 리 없는 입법기구였다. 물론 소련은 북한에서 김일성 계열로 체제를 구성하고 있었기에, 그것을 인정할 필요도 없었다. 한편 국제적으로는 이미 냉전시대였고, 트루먼 독트린(유럽의 대 소련 전선에 군비 지원, 1947.3.12일 트루먼 대통령이 하원에서 선)과 마셜플랜(유럽의 공산화 방지를 위한 재정지원)으로 인해 미-소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1947년 5월 21일에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고, 김구와 이승만을 제외한 국내의 중도세력~우파세력은 주로 좌우합작에 참여하고자 하였으나, 소련 측에서는 미군정과 교섭할 이유가 없었기에 흐지부지 막을 내렸다. 
 
- 이후 국내 인사들의 행보
1) 이승만 : 미국을 등에 업고 한창 도약하고 있었다. 미국 본토에서 자신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촉구하는 외교활동을 했다.
2) 김구 : 김규식을 필두로 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지자들도 좌우합작에 참여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집권은 물건너간 한편, 남한과 북한이 분리되는 현실에서 좌우 문제보다는 민족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는 것을 알고 급히 남북협상에 돌입하게 된다.
3) 여운형 : 이승만, 김구보다 국내에서 민족의 지도자로서 더 주목을 받아왔던 여운형이, 1947.7.19일에 암살당했다.
 
 
 
** 자료 출처 : (특히 각 단체에 관해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7차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이승만과 김구의 해석에 관해서는 사견이 많이 들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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