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서양고대사 정리노트] 고대 그리스 - 귀족정의 위기

취미와 문화 2021. 4. 16.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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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고대사 정리노트] 고대 그리스 - 귀족정의 위기

 

* 아테네는 당시 도시와 농촌의 중산층 이상의 유산시민이 국방의 주력으로 떠오르게 되면서, 평민의 발언권이 점점 비공식적으로 강해지고 있었음. 당시의 군대는 총칼을 나눠주는 게 아니었고, 스스로 무장을 준비해 전투에 참여하는 형식이었음. 그래서 돈이 없으면 무장도 없고, 제대로 밀집보병 대형에 참여할 수 없었음. 만약 참여를 한다고 해도 배에서 노를 젓는 사람 정도는 할 수 있었다고 함. 물론 이렇게 평민권이 신장이 되었다곤 하지만, 평균적으로 돈은 귀족이 많고 평민이 돈이 적었음은 당연지사.


1. 드라콘 법(기원전 621년) : 그리스 최초의 성문법

 

  아테네 귀족정의 위기의 지표 중 하나는 귀족들이 관습법적인 권위를 점차 잃어간다는 것임. 법적 판단의 근거가 귀족들의 머리가 아니라, 국가적 차원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기원전 621년 드라콘법임. 

오로지 하나의 처벌인 사형만이 거의 모든 범죄자들에게 가해졌다. 그 결과 나태한 혐의를 받은 사람도 채소나 과일을 훔친 자도 신성모독이나 살인을 범한 자와 마찬가지로 처벌되었다.” - 플루타르코스, <<솔론>>

  다만 드라콘법의 한계는 죄의 경중이 너무 극단으로 간다는 것임. 죄가 작든 크든 간에 일단 살인자 취급임. 특히 부채를 지면 자유를 상실한다는 점에서는 평민에게 아직 불리한 점으로 작용했다는 것은 분명한 한계였음.(서양사개론)

 

 


2. 솔론(기원전 7~6세기) - '조정자' 

 

 

1. 솔론의 생애에서 중요한 포인트 : 기원전 594년에 아르콘이 되어 아테네의 위기 상황을 이겨내기 위한 개혁가로 등장하여, '조정자'라고 불리움. 그가 살던 시기 아테네에서 부딪친 문제는 부채를 진 가난한 시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사회에는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는 것임. 드라콘 법에서도 이 부채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없었음. 그래서 솔론이 이것을 해결하려고 함.

 

2. 개혁

  1) 594년 세이삭테이아(Seisacteia - 짐 털어버리기, 부채말소) :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는 부채를 말소하고, 부채로 인하여 노예가 된 자유민을 해방하였으며, 부채로 인한 인신의 예속화를 금지하였다.'(서양사개론) 이로써 부채가 있다는 이유로 가난한 그리스 인들이 노예가 되는 길은 일단 막을 수 있었음. 특히 세이삭테이아의 최대 수혜자는 최하층 시민 테테스(Thetes)였음.

  2) 상공업 장려 : 곡물수출을 금지하는데, 주로 아테네의 밀 수출을 금지한 것. 그리스인들이 밀을 주식으로 하는데, 이게 자급자족이 어려운데 밀을 경제적 동기로 수출하는 것은 아테네의 주식확보가 어려워지는 것. 그런 한편 올리브나 포도 재배를 장려하고 그것들의 수출은 장려. 경제활동이 활성화되려면 그것을 가능케하는 여러 기제들이 필요함. 솔론 역시 화폐 유통에 큰 힘을 쏟았음. 솔론의 시대까지만 해도 아테네 사람들은 화폐가 없이 물물교환만 했음. 이 당시 소아시아 - 터키 서남부의 리디아라는 나라는, 지중해 세계에서 화폐를 가장 먼저 주조하여 유통했음. 그래서 이 소아시아의 화폐를 모방하여 아테네에서도 주화를 사용하는 시도가 있었던 것. 물론 학자들 중에는 독자적인 화폐주조는 힘들었고, 리디아의 영향을 받은 정도에 그쳤다는 이들도 있음.(김덕수 교수님)

  3) 금권정 - 재산비례정치 : 군대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느냐?

1등급 펜타코시오 메딤노이(Pentakosio medimnoi; 대지주) : 매년 곡물과 포도주, 올리브유를 최소한 500메딤노이 생산할 수 있는 자.

2등급 히페이스(Hippeis; 중소귀족) : 매년 300메딤노이를 생산할 수 있으며, 말을 살 수 있는 자.

3등급 제우기타이(Zeugitai, 자영농민, 도시민 포함) : 매년 200메딤노이를 생산하여, 황소 2마리를 살 만한 자.

4등급 테데스(Thetes) : 200메딤노이 이하를 생산하는 자.

  4) 400인회 창설 : 당시 아테네에는 부족(phyle; 필레)이 4개였음. 각 부족마다 100명씩 뽑으면 400명이 되는데, 그 400명이 모여서 400인회(boule)를 구성함. 400인회는 아테네 전체의 모임인 민회에서 어떤 일을 결정할 것인지, 안건을 정해야 하였음.

  * 솔론 금권정에서 주목할 만한 점들 기타 : 최하층에게 민회에 참여할 권한을 주었고, 시민법정에도 계층의 구분 없이 참석할 수 있게 해줌. 

 

3. 솔론의 개혁의 의의  

  1) 정치적으로는 참정권을 분배하고자 하였음.

  2) 경제적으로는 경제적 불균형을 해소하려 하였음. 

  3) 아르콘으로서 법으로 이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였음.

   * 하지만 솔론은 귀족과 평민 모두 만족시키지 못했음. 귀족들 입장에서 부채말소란 엄청난 부조리일 뿐이고, 빈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발언권보다는 토지분배가 더 시급했음. 

 

 


3. 기원전 561년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대두

 

1. 아테네 vs 메가라 - 살라미스 쟁탈전 : 아테네는 최초로 대외 전쟁을 겪게 되는데, 인근 지역인 메가라와 살라미스 지역을 두고 쟁탈전을 벌인 것이었음. 당시 이 전쟁을 이끈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꽤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그가 훗날 참주(Tyrant)로 나서게 됨. 한편 살라미스 쟁탈전은 물론 승리로 돌아가긴 했지만, 아테네 내부에서는 솔론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음. 솔론의 개혁이 모두를 만족시키지도 못했고, 어쩌면 사람들에게 와닿지 않는 개혁을 했던 것일지도 모름.

 

2. 기원전 561년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정권 장악 :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폭력적인 독재자라고 이야기되곤 하지만, 의외로 빈민들에게 인기가 좋았음. 당시 아테네는 몇 개의 귀족 세력들이 다투고 있었는데, 그 중에 빈민 지지층을 두고 페이스스트라토스가 정권을 잡게 된 것임.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살라미스 쟁탈전에서 꽤 전공이 있었던 터라, 시민들이 그를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가 정치에 뛰어든 이후로도 빈민들을 위한 각종 정책을 폈음. 참주가 된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귀족을 추방하고, 토지를 재분배하였음(사료가 없으나, 그렇게 추정됨). 토지 재분배야말로 빈민들이 정말 원하던 것이었는데,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가려운 곳을 긁어준 셈이었음. 그런 한편 상공업을 장려하면서 은광을 개발했음. 국가에서 은광을 개발하면 부를 쌓으니, 세금을 줄일 수 있는 기반이 생기게 된 것임. 세금까지 줄여준 셈. 그리고 나아가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트라키아(Thracia) 방면으로 진출하는 한편, 흑해를 통하는 식량공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몇몇 섬들을 확보하였음. 

  그러나 페이시스트라토스의 후임자인 아들은 그리 뛰어나거나 인기가 있었던 것은 아닌 듯 함. 아들 한 명은 살해당하고 한 명은 추방당하여 참주정은 마무리되었음. 그 때가 기원전 510년임. 따지고 보면 50년 간의 참주정이 있었던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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