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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와 각국의 발전] 프랑스 제2제정과 제3공화정

1. 제 2 제정 프랑스 2월 혁명의 결과 성립된 국립작업장의 노동자들은 루이 블랑 등 사회주의 세력이 선거에서 대패하자, 일자리를 잃었다. 즉, 국립작업장은 폐쇄되었다. 그러자 소위 1848년의 '6월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6월 봉기의 결과 공화제 헌법이 제정되고, 보통선거, 단원제, 대통령 중심제 아래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849년 1월에 의회가 해산되고 5월에 선거가 왕당파 중심의 질서당이 다수당을 차지하게 되어 선거법을 개정하였는데, 그 내용에는 하층민의 선거권을 박탈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대통령 재선 금지 개헌까지 제안하게 되는 바, 의회에서는 부결되었다. 나폴레옹은 1851년 12월 2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52년 1월에 신헌법을 만드는 바, 독재적 통치권을 가져갔다...

서양사 2021.08.18

[블로그 관리] 초보 블로거일 때 쉽게 하는 실수들

롱테일 키워드 찾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본 블로그가 돈을 벌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유입이 일어나지는 않으니 조금 외롭네요. 어쨌건 롱테일 키워드를 찾는 방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건오 씨의 라는 책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 저는 1년 가까운 시간동안 역사 관련 키워드를 다루는 블로그를 운영해왔습니다. 그런데 그리 방문해주시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글에 정성을 들이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애초에 인기가 없는 테마여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구글 서치 콘솔에 들어가봐도, 제 블로그에서 사용된 여러 키워드들이 많이 검색되는 키워드들도 아닙니다. 일단은 기본적으로 이 책 역시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세 개 이상 단어로 이루어져 있으나 '명확한 의도를 드러내는 키워드'를 찾아..

에세이 2021.08.18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발전] 빈 체제, 7월 혁명과 2월 혁명의 영향

1. 1830년 7월 혁명 1) 1830 네덜란드로부터 벨기에 독립 :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의 종교재판 강화, 가톨릭 강요 등의 조치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네덜란드의 오렌지공 윌리엄이라는 사람 주도 하에 1579년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하여 네덜란드 독립에 성공했다. 네덜란드가 정식으로 독립하게 된것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었다. 네덜란드는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억제의 사명을 띠고 오스트리아령 벨기에를 할양받았다. 그 결과 네덜란드 왕국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벨기에는 가톨릭인 한편 네덜란드는 고이센-프로테스탄트 지역인데다, 언어와 관습의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네덜란드는 항해 산업인 한편, 벨기에는 농업과 공업 중심이었다. 네덜란드 왕 윌리엄 1세는 네..

서양사 2021.08.18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발전] 2월 혁명

1848년 7월 왕정은 은행가, 대상공업자, 일부 부농들을 위한 정권으로서, 선거권이 차등분배되어 있었다. 게다가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고되게 되고 노동자는 단결하게 된다. 결사를 조직하고 사회주의가 확산되었다. 그에 반해 7월 왕정은 1834년에 노동자에 대한 반 단체법을 제정하게 된다. 7월 왕정에 대한 불만은 커져만 갔으며, 그 불만은 선거권 확대 요구로 수렴되었다. 프랑스 초기 사회주의자 중에 루이 블랑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7월 왕정을 비판하여 부르주아적 정치에 반대한 사람으로서, 산업사회의 경쟁 및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를 비난했다. 보통선거를 통한 노동자 계급의 국가권력 장악을 주장했으며, 이라는 저서에서 국립공장 건설을 주장했다. 그 결과 7월 왕정 특유의 국립 작업장..

서양사 2021.08.17

중등임용고사 모의 시험 - 메가 쌤 megassam

중등임용시험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교사가 되는 시험인 만큼 다들 엄숙하고 진지하게 공부를 하고 있을텐데요, 그 중에 좋은 행사가 있어서 소개해보려 합니다. 메가스터디 하위 플랫폼으로 보이는 '메가쌤(megassam)'에서 전국모의고사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합니다. * 유의 : 들어가보니 교육학 + 전공 영어 + 전공 국어만 가능하더라고요. 신청이 총 4회까지 기회가 있는 것 같은데요, 일단 제1회는 이미 지나간 것 같습니다. 회당 가격은 교육학이 20000원이고, 나머지 전공+교육학은 회당 40000원인 것 같네요. 일단 현장감이나 기존 인강 생각하면 그리 비싸다고 생각은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인강비용이 겁나게 비싸니까요. 아쉽게도 저는 전공이 맞지 않아 사용할 수 없지만, 국어 전공이..

에세이 2021.08.17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발전] 빈 체제에 대한 반항과 7월 혁명

1.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 1) 독일 부르센샤프트(학생조합, 1815) : 독일에서는 *라이프치히 전승 4주년, 루터의 종교개혁 300주년 기념 축제 중 보수적 서적과 프로이센 병사 군복을 소각하였다. 2) 1819년 독일 예나 대학생이 황제의 스파이 코체부를 암살하였다. 이로써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가 카를수바드 법령을 제안하는데, 학생조합 해산, 대학에 감독관을 파견해 감시하는 한편, 출판물 검열을 강화하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3) 에스파냐 : 보통선거, 제한 군주제를 규정한 민주적 헌법을 채택했다. 4) 나폴리 : 비밀결사 카르보나리당의 활동이 활발했다. * 라이프치히 전투 : 1813년 10월 16일 부터 19일까지 벌어졌으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패배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전투..

서양사 2021.08.17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발전] 빈 체제의 운영

자유주의는 근대의식의 성장과 시민혁명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고 본다. 자유주의란 사회보다 개인을 중시하고, 평등이나 보편주의에 바탕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 빈 회의(1814~1815) : 시대에 역행하는 체제인가, 유럽안정을 가져온 체제인가? 빈 회의의 배경은 자유주의가 확산되었을 때 무너져내릴 수 있는 왕국들이 위기의식을 느낀 것을 꼽을 수 있다. 대표적인 나라가 오스트리아이고, 오스트리아의 재상이 메테르니히였다. 메테르니히가 주도하는 이 빈 회의는 근대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그 내용을 보면 '신성한 정통성의 원리'를 내세워 혁명 전의 상태로 복귀하고자 하는 것이 요점이다. 혁명이란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이전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정통적인 것이란 혁명 전의 상태를 이야기..

서양사 2021.08.17

[프랑스혁명] 테르미도르 반동과 총재정부

4.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 반동 국민공회 내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 반대하는 이들이 결국 로베스피에르를 잡아다 사형시켜버렸다. 전쟁과 반란은 어느 새 정리가 된 상태였고, 혁명의 열기는 점점 식어가던 중이었다. 로베스피에르를 타도한 테르미도르파는 혁명전쟁 내내 자신들을 괴롭혔던 혁명재판소, 공안위원회 등 공포정치 기구들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혁명재판소는 해산되었고, 공안위원회는 권한이 극도로 축소되었다. 95년 헌법이 입법되는데, 이것은 양원제의 입헌 공화국의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유산계급 중심의 제한선거에 입각한 5백인회와 원로원의 양원제, 5인 총재 주도의 행정부가 특징이다. 5. 총재정부(1795.10~1799.11) 총재정부는 기존에 물가를 잡고 있던 최고가격제를 폐지하였고, 당..

서양사 2021.08.17

[프랑스혁명] 입법의회와 국민공회

2. 입법의회(1791.1~1792.9) 91년 헌법에 의해 입법의회가 성립되었다. 우파인 페이앙파, 좌파인 자코뱅파, 그리고 중간파가 입법의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자코뱅파에는 온건한 지롱드(브리소파)가 있었으며 중간파를 포섭하여 주도권을 획득하려 했다. 입법의회 구성은 혁명전쟁 전야를 알리는 일이었다. 혁명전쟁은 1792년이래 23년간 지속되었다. 독일 지역에 망명한 반동귀족들은 혁명에 반대했고, 독일 지방 제후들 중에는 봉건제 폐지로 인해 알자스 지방의 권리를 상실한 이들도 있었다. 교황령이었던 아비뇽은 프랑스에 병합되었고,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은 혁명의 분위기를 반기지 않았다. 1792년 4월 20일에 지롱드 파는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날렸고,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에 가담하여 대응하였다. 프랑..

서양사 2021.08.17

[프랑스혁명] 국민의회

프랑스 국민의회는 투표권을 가진 부르주아들이 특권을 배제하고 구성한 의회이며, 재산본위의 대의제 입각 자유주의를 추구했다. 빈민들에게는 당연히 불합리한 지향이었다. 그래도 국민의회가 성립하기까지는 대단한 노력들이 있었다. 1789년 6월 17일에 제3신분 대표들이 머릿수 표결을 재차 제안하면서 국민의회를 선포했다. 머릿수표결은 제3신분 투표권 확장을 위해 꼭 필요한 조치였다. 이를 위해서는 새 헌법이 필요했으며, 새 헌법을 요구하기 위해 삼삼오오 테니스코트에 모였다. 1789년 6월 20일 테니스코트 서약에서는 새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였다. 루이 16세는 제2신분 귀족, 제1신분 성직자 대표들에게 국민의회 참가를 지시했고, 어쩔 수 없이 삼부회를 해체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런 ..

서양사 202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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